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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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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핀 혁명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1896년 혁명, 1898년 혁명, 미국-필리핀 전쟁 등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1834년 마닐라 개항 이후 신흥 유산 계급의 성장과 계몽주의의 확산, '곰부르자 사건'과 같은 사건들이 혁명의 배경이 되었다. 1896년 '카티푸난' 결성을 시작으로 무장 봉기가 일어났으나, 미국과의 군사력 격차, 내부 분열, 지도자의 한계 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일본은 필리핀 독립을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부인마루 사건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고, 1946년에야 독립을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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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혁명 - [전쟁]에 관한 문서
주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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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아시아의 탈식민지화 및 미국-스페인 전쟁
기간1896년 8월 23일 – 1899년 1월 23일
장소필리핀
결과결정적이지 않음
파리 조약에서 스페인이 필리핀을 미국에 양도함
필리핀-미국 전쟁이 곧 시작됨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 독립 선언
영토필리핀 혁명 정부 수립 및 추후 필리핀 제1공화국이 주권 주장
교전 세력 (1896–1897)
1896–1897카티푸난
주권 타갈로그 민족 (1897년 3월까지)
테헤로스 정부 (1897년 3월 – 11월)
비악나바토 공화국 (1897년 11월 – 12월)
1898필리핀 혁명가
독재 정부 (5월–6월)
혁명 정부 (6월부터)
(5월)
1896–1897
필리핀 총독부
팜팡가 주
1898
필리핀 총독부
팜팡가 주
지휘관
필리핀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사형)
에밀리오 아기날도
로만 바사 (사형)
테오도로 플라타 (사형)
라디슬라오 디와
에밀리오 하신토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
훌리오 낙필
마카리오 사카이
마리아노 알바레스
마리아노 트리아스
산티아고 알바레스
발도메로 아기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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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오 막실롬
아니세토 락손
미국조지 듀이
웨슬리 메릿}}
스페인라몬 블랑코
카밀로 데 폴라비에하
페르난도 프리모 데 리베라
바실리오 아우구스틴
페르민 야우데네스
디에고 데 로스 리오스
호세 오라게르 펠리우
호세 데 라참브레}}
병력 규모
필리핀 (1896)100,000–400,000
스페인 (1896)12,700–17,700
사상자
필리핀대략 28,646명이 전사 또는 부상으로 사망, 질병으로 인한 추가 사망자 발생
스페인알려지지 않음, 질병으로 인한 다수 사망자 발생
필리핀 민간인스페인 군대와 카티푸난의 잔학 행위로 많은 필리핀 민간인 사망

2. 과정

16세기 후반 이래 스페인의 식민 지배 하에 있던 필리핀에서는 19세기 후반, 식민 통치 개혁을 목표로 한 프로파간다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는 점차 급진화되어 1896년 무장 독립 혁명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혁명은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 혁명 세력은 이를 기회로 삼아 두 번째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필리핀인 스스로 의회를 열고 헌법을 제정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스페인과의 강화 조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하고 필리핀의 독립을 부정했다. 이는 필리핀의 독립 의지를 묵살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결국 미국-필리핀 전쟁으로 이어졌다.

필리핀 민중은 미국의 지배에 맞서 게릴라전 등으로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결국 패배하고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1916년 마누엘 케손 등의 노력으로 필리핀 자치를 인정하는 〈존스 법〉이 통과되었고, 1934년에는 10년 후 독립을 약속하는 〈필리핀 독립법〉이 제정되어 독립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1942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독립은 다시 미뤄졌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독립 투쟁 과정을 혁명이 아닌 "필리핀 반란"(Philippine Insurrection영어)이라고 칭하며 그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26][138]

필리핀 독립 혁명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2. 1. 전사(前史)

16세기 후반 이래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 온 필리핀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 변화와 함께 민족 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834년 마닐라가 세계 무역에 개방되면서 경제적 성장을 이룬 필리핀인 신흥 유산층(일루스트라도)이 등장했고, 이들은 고등 교육을 통해 자유주의민족주의 사상을 접하며 스페인 식민 통치의 불평등과 모순을 인식하게 되었다.[15][27][28]

이러한 민족 의식의 성장은 스페인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초기 저항은 필리핀인 사제들이 주도했다. 스페인인 수도회가 장악한 교회 내에서 필리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마리아노 고메스,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사모라 세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872년 카비테 반란이 발생하자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 세 신부에게 반란 배후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이 사건은 세 신부의 이름을 따 '곰부르자 사건'(Gomburza)이라 불리며, 필리핀 민족 의식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18]

1880년대에는 일루스트라도들이 중심이 되어 스페인에 필리핀인의 동등한 권리와 정치 참여 등 개혁을 요구하는 프로파간다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주로 글을 통해 스페인 식민 통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필리핀 사회의 계몽을 추구했다. 호세 리잘은 소설 ''노리 메 탕헤레''(1887)와 후속작 ''엘 필리부스테리스모''(1891)를 통해 스페인 식민 지배의 부패와 폭압을 고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19] 마르셀로 델 필라는 최초의 타갈로그어 일간지 ''타갈로그 신문''(1882)을 창간하고, 이후 스페인에서 운동의 기관지인 ''라 솔리다리다드''(1889-1895)를 발행하며 개혁 사상을 전파했다.

하지만 프로파간다 운동은 스페인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하는 온건한 성격을 띠었다. 당시 리잘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은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스페인과의 동등한 권리 확보와 자치권 확대를 우선시했다. 그러나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러한 온건한 개혁 요구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탄압으로 일관했다. 1892년 개혁 운동 조직인 라 리가 필리피나를 결성하기 위해 귀국한 리잘은 스페인 당국에 의해 즉시 체포되어 민다나오섬다피탄으로 유배되었다.[20] 리잘의 체포와 유배는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고, 재정난까지 겹치면서 ''라 솔리다리다드''는 1895년 결국 폐간되었다. 이처럼 10년 이상 지속된 프로파간다 운동은 필리핀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스페인 당국의 강경한 탄압과 내부적 한계로 인해 실질적인 개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이러한 평화적 개혁 운동의 실패는 이후 필리핀 민족 운동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카티푸난과 같은 비밀 결사를 통한 무장 독립 투쟁 노선으로 나아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1. 1. 마닐라 개항과 경제 변화

스페인 내의 개혁 운동의 지도자, 호세 리잘, 마르셀로 델 필라 그리고 마리아노 폰세. 사진은 1890년 스페인에서 촬영


마드리드 황실 건물의 계단에 모여서 사진을 찍은 일러스트라도스


19세기 초, 필리핀이 세계 무역에 개방되면서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34년 왕실 칙령에 따라 마닐라가 공식적으로 세계 무역에 개방되기 전까지, 스페인 당국은 다양한 왕실 칙령(1800년, 1807년, 1816년 등)과 총독령(1823년, 1840년)을 통해 외국 상인들의 필리핀 거주, 소매 무역, 지방 방문 및 여행을 엄격히 금지했다.[30][31][32][33]

그러나 18세기 후반 자유방임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영국의 마닐라 점령(1762-1764)을 겪으며 스페인은 필리핀을 고립시키는 정책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34] 1789년에는 외국 선박이 아시아 상품을 마닐라 항으로 운송하는 것이 허가되었고,[35] 1790년 펠릭스 베렝게르 데 마르키나 총독은 스페인 국왕에게 마닐라 개항을 권고했다.[36]

필리핀은 1565년부터 멕시코의 일부로 간주되어 통치되었으며,[14] 식민 통치 비용은 주로 마닐라 갈레온 무역을 통해 충당되었다. 하지만 외국 상인과의 경쟁 심화로 1815년 갈레온 무역은 종식되었고,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스페인마드리드에서 필리핀을 직접 통치하며 새로운 재원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15] 이러한 상황과 필리핀 왕립회사의 파산 등이 맞물려, 스페인 국왕은 1834년 9월 6일 왕실 칙령을 통해 마닐라 항을 전면 개방했다.[37]

마닐라 개항 이후 외국 상인 및 자본의 유입이 활발해지면서 필리핀의 사회 경제 구조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특히 농업 생산과 수출이 증대되면서 필리핀인 중에서 부를 축적한 새로운 유산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주로 유럽 등지로 유학하여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확산된 자유주의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 지식인 계층은 '일루스트라도'라 불리며, 스페인 식민 통치의 모순과 지배자인 스페인인과 피지배자인 필리핀인 사이의 불평등한 지위를 점차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필리핀 민족 의식 형성과 프로파간다 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1. 2. 계몽 운동과 민족주의의 성장



19세기 필리핀이 세계 무역에 개방되면서 사회 변화가 일어났고, 이는 혁명적 사상이 유입되는 배경이 되었다. 1834년 마닐라가 공식적으로 세계 무역에 개방되면서[15] 필리핀의 신흥 유산자 계급이 빠르게 성장했다. 유학 등을 통해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일루스트라도)은 지배자인 스페인인과 피지배자인 필리핀인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27][28] 또한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스페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더 많은 스페인인(페닌술라레스)들이 필리핀으로 이주하여 기존에 크리올로(필리핀 태생 스페인인)들이 차지하던 정부 직책을 맡게 되자, 크리올로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커졌다.

1868년 스페인 혁명으로 이사벨라 2세 여왕이 퇴위하고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1869년 새로운 총독으로 카를로스 마리아 데 라 토레가 임명되었다.[16] 데 라 토레는 자유주의 정책을 펴 필리핀 내 개혁 분위기를 조성했고, 필리핀 지도자, 사제, 학생들은 이를 환영했다.[16] 마닐라에는 개혁 논의를 위한 후따 헨네랄 데 레포르마스(Junta General de Reformas)가 설립되기도 했으나, 수도사들의 반발 등으로 실질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46]

이러한 신흥 민족주의 흐름 속에서 스페인 지배에 처음으로 조직적인 이의를 제기한 것은 필리핀인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스페인 수도회가 장악한 필리핀 가톨릭 교회 내에서 필리핀인이라는 이유로 본당 주임 사제 승진 등에서 차별받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마리아노 고메스,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사모라 세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871년 데 라 토레 총독이 교체되고 보수적인 이스키에르도 총독이 부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17] 1872년 1월 20일, 카비테 군항에서 노동자들의 폭동(카비테 반란)이 발생하자, 스페인 식민 정부는 이 사건의 배후로 세 신부를 지목하여 2월 17일 공개 처형했다.[18] 이 사건은 세 신부의 이름을 따 '곰부르자 사건'(GOMBURZA)으로 불리며, 필리핀 민족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세 리살은 훗날 자신의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이들에게 헌정했다.[19]

마르셀로 델 피라르


곰부르사 사건 이후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한 필리핀인들과 유학생들은 1880년대에 들어 프로파간다 운동이라는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주로 글을 통해 스페인 식민 통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필리핀인의 정치 참여 등 개혁을 요구했다. 1882년, 마르셀로 히라리오 델 피라르는 최초의 타갈로그어 일간지인 ''타갈로그 신문''(Diariong Tagalogtl, 스페인어와 타갈로그어 병용)을 창간하여 수도회의 부당한 지배를 비판했다. 1887년, 호세 리살은 스페인 통치하 필리핀 사회의 부패와 모순을 고발한 소설 ''노리 메 탕헤레''(Noli Me Tángerela)를 베를린에서 출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어 1891년에는 후속작 ''엘 필리부스테리스모''(El Filibusterismoes)를 발표했다.

1889년 2월 1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프로파간다 운동의 기관지인 ''라 솔리다리다드''(La Solidaridades, 단결)가 창간되어 이후 델 필라가 편집을 맡았다. 이 시기 운동의 목표는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스페인 통치하에서의 동등한 권리와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한 것이었으며, 리살 역시 당시에는 독립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당국은 이러한 개혁 요구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1892년 7월 3일, 필리핀으로 귀국한 리살이 개혁을 위한 조직으로 '라 리가 필리피나'(La Liga Filipina, 필리핀 민족 동맹)를 결성하자, 스페인 당국은 불과 며칠 뒤인 7월 6일 리살을 체포하여 민다나오섬다피탄으로 유배 보냈다.[20] 리살의 체포와 추방은 개혁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재정난까지 겹친 ''라 솔리다리다드''는 1895년 11월 15일 결국 폐간되었다. 이처럼 10년 이상 지속된 프로파간다 운동은 필리핀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스페인 식민 정부의 완강한 태도로 인해 실질적인 개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 1. 3. 프로파간다 운동의 한계



1834년 마닐라 개항 이후 필리핀 사회는 변화를 겪었고, 이를 통해 필리핀인 신흥 유산층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들은 유학 등을 통해 고등 교육을 받으며 지배자인 스페인인과 피지배자인 필리핀인 사이의 불평등한 지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족 의식의 성장 속에서 스페인 지배에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들은 필리핀인 사제들이었다. 스페인인 수도회 사제들이 장악한 필리핀 가톨릭 교회 내에서 필리핀인이라는 이유로 본당 주임 사제로의 승진이 막히는 차별에 불만을 품고, 마리아노 고메스,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 세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1872년 1월 20일 카비테 군항에서 노동자 폭동이 발생하자,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 세 신부에게 폭동 배후라는 누명을 씌워 같은 해 2월 17일 모두 처형했다. 이 사건은 세 신부의 이름을 따 '''곰부르자 사건'''(Gomburza)이라 불리며, 필리핀 민족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18]

1880년대에 들어서는 일루스트라도라 불리는 민족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스페인에 필리핀인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프로파간다 운동'''을 전개했다. 1882년 마르셀로 델 필라는 최초의 타갈로그어 일간지 《타갈로그 신문》(Diario de Tagalog|디아리오 데 타갈로그es, 스페인어타갈로그어 병용)을 창간하여 스페인 수도회의 지방 정치 지배를 비판했다. 1887년에는 호세 리잘이 스페인 식민 통치의 부패와 폭압을 고발한 소설 《노리 메 탕헤레》(Noli Me Tángere|놀리 메 탕헤레la)를 출판하여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19] 1889년 2월 15일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운동의 기관지인 《단결》(La Solidaridad|라 솔리다리다드es)이 창간되어 이후 델 필라가 편집을 맡았다.

하지만 이 시기 프로파간다 운동은 식민 지배의 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온건한 계몽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리잘 역시 당시에는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스페인 내에서의 동등한 권리와 자치권 확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러한 온건한 개혁 요구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1892년 7월 3일,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라 리가 필리피나(La Liga Filipina|라 리가 필리피나es, 필리핀 민족 동맹)를 결성한 리잘을 스페인 당국은 즉시 체포하여[20] 같은 달 7월 6일 민다나오섬 다피탄으로 유배 보냈다. 리잘의 체포와 유배는 라 리가 필리피나의 와해로 이어졌고, 운동의 구심점을 잃게 만들었다. 또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단결》지도 1895년 11월 15일 결국 폐간되었다.

결과적으로 10년 넘게 지속된 프로파간다 운동은 스페인 당국의 강경한 탄압과 내부적인 한계로 인해 필리핀 사회 개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이러한 개혁 운동의 실패는 필리핀 민족 운동이 점차 무장 투쟁 노선으로 나아가는 배경이 되었다.

2. 2. 1896년 혁명

카티푸난의 창시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카티푸난 독립군


호세 리살다피탄으로 추방되자, 평화적 개혁 운동에 한계를 느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1892년 7월 7일 비밀 결사 카티푸난을 조직하여 무력 독립 투쟁을 준비했다. 카티푸난은 주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7]

1896년 8월, 카티푸난의 존재가 스페인 당국에 발각되면서 탄압이 시작되자, 보니파시오는 8월 30일 무장 봉기(산후안 델 몬테 전투)를 일으켜 필리핀 독립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혁명은 카비테주 등지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지역 유력 가문 출신인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다. 스페인 당국은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1896년 12월 30일 호세 리살을 처형했으나, 이는 오히려 필리핀 민중의 독립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혁명 지도부 내에서는 하층민을 대변하는 보니파시오와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아기날도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1897년 3월 22일 열린 테헤로스 회의에서 아기날도가 혁명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이에 반발한 보니파시오는 아기날도 측에 의해 5월 10일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혁명 세력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보니파시오 사후 아기날도가 혁명군의 전권을 장악했지만, 스페인 군대의 반격으로 독립군은 수세에 몰렸다. 결국 불라칸주의 비아크-나-바토로 후퇴한 아기날도는 1897년 11월 비악나바토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으나,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페인과 비아크-나-바토 협정을 체결했다. 아기날도는 스페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12월 25일 홍콩으로 망명했지만, 필리핀 내에서는 여전히 많은 독립 투사들이 항전을 이어갔다.

2. 2. 1. 카티푸난 결성



19세기 들어 필리핀이 세계 무역에 개방되면서[15] 프랑스 혁명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었고, 이는 필리핀 민족주의 의식 성장의 배경이 되었다. 특히 1872년 카비테 반란과 이를 계기로 호세 부르고스, 마리아노 고메스, 하신토 사모라 세 신부가 처형된 사건(곰부르사)[18]은 많은 필리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9]

이후 유럽 등지로 망명하거나 유학 간 필리핀 지식인들은 프로파간다 운동을 전개하며 스페인 식민 통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했다. 그들은 마드리드에서 솔리다리다드와 같은 신문을 발간하며[46] 필리핀인의 법적 평등, 코르테스 참여, 가톨릭 교구의 필리핀인 사제 임명, 언론 및 집회의 자유 등을 주장했다.[49] 이 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호세 리살은 노리 메 탕헤레(1887)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1891) 같은 소설을 통해 스페인의 부당한 통치와 사회 모순을 고발했다. 1892년 필리핀으로 돌아온 리살은 개혁을 위한 조직인 라리가 필리피나(필리핀 연맹)를 결성했으나, 스페인 당국은 그를 즉시 체포하여 다피탄으로 유배 보냈다.[48]

리살의 체포와 유배는 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라리가 필리피나의 회원이었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평화적인 개혁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무장 투쟁을 통한 독립을 결심하게 된다. 1892년 7월 7일, 보니파시오는 데오다토 아렐라노, 라디슬라오 디와, 테오도로 플라타, 발렌틴 디아즈 등 동지들과 함께 마닐라 시내 톤도 지역의 한 집에서 비밀 결사 조직인 카티푸난을 결성했다.[50] 카티푸난의 정식 명칭은 Kataas-taasang,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카타아스타아상, 카갈랑갈랑강 카티푸난 낭 망아 아낙 낭 바얀tgl으로, '가장 높고 존경받는 애국 자제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50] 카티푸난의 궁극적인 목표는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무력 혁명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었다.

카티푸난은 프리메이슨의 조직 구조와 의례를 일부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며, 보니파시오를 비롯한 주요 창립 멤버들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조직은 마닐라를 중심으로 바탕가스, 라구나, 카비테, 불라칸, 팜팡가, 탈락, 누에바 에시하 등 루손섬의 여러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7] 회원들은 '카티푸네로(Katipunero)'라 불렸으며, 주로 하층민과 중산층으로 구성되었다.[7] 카티푸난은 자체적인 법규와 위계질서를 갖춘 조직이었다.[7] 최고 결정 기구인 최고 의회(Kataas-taasang Kapulungantgl) 아래 각 주(州)를 담당하는 주 의회(Sangguniang Bayantgl)와 지역 또는 마을 단위의 지방 의회(Panguluhang Bayantgl)를 두었다.[8][7] 1895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의 최고 지도자인 '수프레모'(Supremotgl) 또는 최고 의장(Presidente Supremotgl)으로 추대되었다.[53][51] 당시 회원 수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52]

카티푸난은 조직 확대와 함께 혁명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896년 3월에는 기관지인 《칼라얀》(Kalayaantgl, 자유)을 비밀리에 창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스페인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발행지는 일본의 요코하마로 위장했다. 같은 해 5월 4일, 보니파시오를 비롯한 카티푸난 지도부는 필리핀에 기항 중이던 일본 해군 연습함 '곤고'에 승선하여 함장 세라다 료와 만나 혁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2. 2. 2. 무장 봉기



호세 리살이 체포되어 다피탄으로 추방되자, 라리가 필리피나에 참여했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개혁 운동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리살이 유배된 1892년 7월 6일, 보니파시오는 마닐라 시내 톤도 지역에서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비밀 결사 조직인 카티푸난을 결성했다. 카티푸난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많은 하층민들을 조직원으로 끌어들였다.

1896년 3월, 카티푸난은 기관지 《독립》(Kalayaan)을 창간했다. 스페인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발행지는 일본의 요코하마로 위장했다. 한편, 카티푸난 지도부는 필리핀에 기항한 일본 제국 해군의 연습함 '곤고'에 승선한 일본 군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5월 4일, 보니파시오를 비롯한 카티푸난 간부들은 세라다 료 함장과 회담하며 혁명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티푸난의 존재는 곧 스페인 식민 당국에 발각되었고, 1896년 8월 19일부터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 회원들은 8월 30일 산후안 델 몬테 전투를 시작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필리핀 독립 혁명의 시작이었다.

초기 마닐라 시내 전투에서 카티푸난은 스페인 군대에 밀려 고전했지만, 혁명의 불길은 마닐라 근교 카비테 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카비테 주에서 독립파는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1896년 10월경, 카비테 주의 카티푸난 조직을 이끌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카비테 주 동부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아기날도 세력은 점차 보니파시오 중심의 카티푸난 중앙 조직과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스페인 당국은 유배지에 있던 리살을 마닐라로 소환하여 반란 선동 혐의를 씌웠고, 1896년 12월 30일 그를 처형했다. 리살의 처형은 필리핀 민중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여 독립 의지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리살 처형을 전후하여 독립파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독립 운동의 지도권을 놓고 상층 계급을 대표하는 아기날도와 하층 계급을 기반으로 한 보니파시오 사이에 치열한 대립이 벌어졌다. 아기날도는 본래 스페인 식민 정부에 의해 카비테의 촌장으로 임명되었던 인물로, 지방 유력 가문(프린시팔리아) 출신이었다. 이들 프린시팔리아 계층은 주로 부유층과 대토지 소유주들로 구성되었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카비테 주 등 남부 타갈로그 지방의 최대 지주였던 가톨릭 수도회의 해체를 원했지만, 보니파시오 파가 주장하는 사회 개혁 요구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사회적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1897년 3월 22일, 카티푸난 지도부는 테헤로스 회의를 열어 혁명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아기날도 파와 보니파시오 파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당시 스페인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얻고 있던 아기날도 파가 아르테미오 리카르테 파의 지지를 얻어 회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결국 회의에서는 아기날도를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에 불복한 보니파시오와 그의 형제는 회의장을 떠나 아기날도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혁명 노선을 추구하려 했다. 그러나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 파의 이탈이 혁명 전선에 분열을 가져올 것을 우려하여 그들을 체포했고, 1897년 5월 10일 보니파시오 형제를 모두 처형했다. 이로써 아기날도는 독립파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 사건은 혁명 세력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1896년 10월부터 1897년 초에 걸쳐 스페인 본국으로부터 병력을 증원받은 식민지 군대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한때 루손섬 중남부 지역을 장악했던 독립군은 보니파시오가 처형된 다음 날, 주요 거점이었던 카비테 주를 포기하고 산악 지대인 불라칸주의 비아크-나-바토로 후퇴해야 했다. 1897년 11월 1일, 아기날도는 이곳에서 독자적인 헌법인 '비아크-나-바토 헌법'을 제정하고 '필리핀 공화국(비아크-나-바토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지만,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아기날도는 스페인 총독과의 협상을 통해 11월 18일부터 12월 15일에 걸쳐 비아크-나-바토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스페인 측은 필리핀에서의 개혁 실행을 약속했고, 아기날도와 그의 지도부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홍콩으로 망명했다(12월 25일). 아기날도는 홍콩에서 망명 지도부를 조직했지만, 필리핀 내에서는 보니파시오의 노선을 따르는 많은 독립 투사들이 각지에서 항전을 계속 이어나갔다.

2. 2. 3. 테헤로스 회의와 보니파시오의 죽음

호세 리살 처형 전후부터 독립파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독립파 내 상층 계급을 대표하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하층 계급을 대표하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독립 혁명의 지도권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아기날도는 원래 스페인에 의해 카비테의 마을장으로 임명된 인물로, 지방 사회에서 힘을 가진 프린시팔리아 계층 출신이었다. 부유층과 대토지 소유주가 많았던 이 사회 계층은 대체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그 때문에 카비테 등 남부 타갈로그 지방에서 최대 지주였던 수도회 해체를 원했다), 보니파시오파의 사회 개혁 요구에 대해서도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1897년 3월 22일, 카티푸난 지도부에 의한 테헤로스 회의에서 양측은 대결했지만, 스페인 식민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아기날도파가 회의에서 우세를 점했고, 아르테미오 리칼테파의 지지를 얻어 회의에서는 아기날도를 혁명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패배한 보니파시오 형제는 회의장에서 퇴장하여 아기날도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혁명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파의 이탈을 우려한 아기날도는 그들을 체포하여 1897년 5월 10일 형제 모두를 처형하고 독립파의 전권을 장악했다.

보니파시오의 처형은 독립파 내부에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으며, 혁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니파시오 처형 다음 날 독립군은 거점인 카비테를 포기하고 산악 지대 불라칸주 비악나바토(Biak-na-Bato)로 몰렸다. 여기서 아기날도 일파는 11월 1일 독자적인 헌법(비악나바토 헌법)을 제정하고 「필리핀 공화국」(비악나바토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지만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2. 2. 4. 비아크나바토 공화국

필리핀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896년1897년에 열린 이무스와 테헤로스에서의 연속 회의는 새로운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1897년 11월,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은 불라칸주의 비악나바토에서 비악나바토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헌법을 공포했다. 이는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스스로 국가를 세우려는 중요한 시도였다.

2. 3. 1898년 혁명

1896년에 시작된 첫 번째 필리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면서 필리핀 독립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났다. 홍콩에 망명 중이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의 지원 약속을 받고 필리핀으로 귀환하여 독립 운동을 재개했다.

19세기 말 필리핀 지도


1898년 혁명 과정에서 필리핀인들은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6월 12일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했으며, 이후 말로로스에 임시 수도를 정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1899년 1월에는 말로로스 헌법을 제정하고 필리핀 제1공화국(말로로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 등 독립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 시기 혁명 정부는 민다나오를 제외한 필리핀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필리핀의 독립을 지원하는 듯했던 미국1898년 12월 10일 스페인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필리핀의 주권을 획득했다. 미국은 2000만달러를 스페인에 지불하고 필리핀을 자국의 영토로 삼으려 했으며,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우애적 동화 선언'을 통해 필리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이는 결국 필리핀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미국-필리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혁명이 아닌 "필리핀 반란"(''Philippine Insurrection'')이라고 칭하며 그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2. 3. 1. 미국-스페인 전쟁과 아기날도의 귀환

말로로스 혁명 의회, 당시의 사진


1898년 4월 25일, 쿠바 독립 전쟁을 계기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 직전 홍콩에 망명 중이던 에밀리오 아기날도 지도부는 미국 측과 필리핀 독립을 지원한다는 밀약을 맺었다. 4월 30일부터 5월 1일까지 벌어진 ‘마닐라 만 해전’에서 조지 듀이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아기날도는 5월 19일 미군과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아기날도는 5월 24일 자신의 근거지인 카비테에서 ‘독재 정권’ 수립을 선언하였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하며 ‘독재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 날은 현재 필리핀의 독립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6월 중에는 독재 정부를 ‘혁명 정부’로 개편하고 지방 정부 조직화에 착수했으며, 7월 15일에는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을 출범시켰다. 또한, 외국에서 무기 구매 협상을 담당하던 홍콩위원회(1896년 11월 결성)는 6월 23일 혁명 정부의 외교 활동과 무기 조달을 담당하는 공식 기관인 홍콩 주재 ‘혁명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행정 기구 정비와 함께 독립군은 미군과 협력하여 스페인군을 공격했고, 8월 말까지 루손 중부와 남타갈로그 지역을 해방시켜 혁명 정부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필리핀 독립군과 미군 사이의 협력 관계는 점차 껄끄러워졌다. 8월 13일, 미군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중심지였던 마닐라를 점령하고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그때까지 전투에 크게 기여한 필리핀 독립군의 마닐라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9월 10일, 마닐라 근교의 불라칸주 말로로스가 임시 수도가 되었다. 9월 15일에는 필리핀 대표들로 구성된 말로로스 의회가 출범하였고, 1899년 1월 21일에는 자체 헌법인 〈말로로스 헌법〉을 제정하였다. 마침내 1월 23일, 필리핀 제1공화국(말로로스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독립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 시점에서 공화국 정부는 민다나오를 제외한 필리핀 전 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1898년 12월 10일 미국과 스페인은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스페인에 2000만달러를 지불하는 대가로 필리핀의 주권을 넘겨받았다. 이어 12월 21일 미국 매킨리 대통령은 소위 ‘우애적 동화 선언’(Benevolent Assimilation Proclamation영어)을 발표하며 필리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부정하였다. 이는 필리핀인들의 독립 의지를 꺾고 미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

2. 3. 2. 필리핀 독립 선언과 혁명 정부 수립



1898년 4월 25일, 쿠바 독립 전쟁을 계기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직전 홍콩에서 미국 측과 독립 원조에 관한 밀약을 맺었던 아기날도 망명 지도부는 5월 1일 마닐라 만 해전에서 미국 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압승을 거두자, 5월 19일 미군 함선을 타고 필리핀으로 귀환했다.

5월 24일, 아기날도는 자신의 근거지인 카비테에서 "우리의 고귀한 열망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군대의 지휘를 맡기 위해 돌아왔고, 나의 단독 책임하에 법령을 발표할 독재 정부를 수립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며 '독재 정권' 수립을 발표했다.[21] 이어 6월 12일에는 카비테에서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스스로 '독재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했다.[22] 필리핀은 현재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6월 18일 아기날도는 독재 정부 수립을 공식화하는 법령을 발표했고,[23] 6월 23일에는 독재 정부를 '혁명 정부'로 개편하는 법령을 발표하며[24] 지방 정부 조직화에 착수했다. 7월 15일에는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하는 혁명 정부 내각이 출범했다. 또한, 외국에서의 무기 구매 협상을 담당했던 재외 유지들의 홍콩위원회(1896년 11월 결성)는 혁명 정부의 외교 활동과 무기 조달을 담당하는 홍콩 주재 '혁명위원회'로 6월 23일 공식 개편되었다.

이러한 행정 기구 정비와 함께, 독립군은 미군과 협력하여 각지를 공략했고, 8월 말까지 루손 중부와 남부 타갈로그 지역을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시켜 혁명 정부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필리핀 독립군과 미군 사이의 협력 관계는 점차 미묘해졌다. 8월 13일, 미군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중심지였던 마닐라를 점령하고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그때까지 전투에 크게 기여해 온 필리핀 독립군의 마닐라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기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9월 10일 마닐라 근교의 불라칸주 말롤로스가 임시 수도가 되었다. 9월 15일에는 필리핀 대표들로 구성된 말롤로스 의회가 출범했으며, 1899년 1월에는 마비니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다시 구성되었다. 1월 21일에는 말롤로스 헌법을 제정하고, 1월 23일 필리핀 제1공화국 (말로로스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독립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 시점에서 공화국 정부는 민다나오를 제외한 필리핀 전 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리핀인들의 독립 의지와는 별개로, 미국은 이미 1898년 12월 10일 스페인과의 파리 강화 조약을 통해 2000만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에 대한 주권을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았다. 필리핀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이 조약 이후, 미국 매킨리 대통령은 12월 21일 '우애적 동화 선언'을 발표하며 필리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미국의 통치를 예고했다. 이는 필리핀 민족의 독립 열망을 짓밟는 제국주의적 행보였다.

2. 3. 3. 마닐라 점령과 미국의 배신



1898년 4월 25일, 쿠바 독립 전쟁을 계기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직전 홍콩에서 미국과 독립 원조에 관한 밀약을 맺었던 아기날도 망명 지도부는 마닐라 만 해전(4월 30일 ~ 5월 1일)에서 미국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크게 격파하자, 5월 19일 미군과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5월 24일, 아기날도는 카비테에서 독재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하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날은 현재 필리핀의 독립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6월 중 독재 정부는 '혁명 정부'로 개편되었고,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7월 15일 출범했다. 또한, 외국에서 무기 구매 협상을 담당하던 홍콩위원회는 혁명 정부의 외교 및 무기 조달을 담당하는 공식 기관인 '혁명위원회'로 6월 23일 개편되었다. 이러한 행정 기구 정비와 함께 필리핀 독립군은 미군과 협력하여 스페인 세력을 몰아냈고, 8월 말까지 루손 중부와 남타갈로그 지역 대부분을 해방시켜 혁명 정부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필리핀 독립군과 미군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8월 13일, 미군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중심지였던 마닐라를 점령하고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미군은 그때까지 함께 싸우며 군사적으로 크게 기여한 필리핀 독립군의 마닐라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필리핀 독립에 대한 미국의 초기 약속과는 다른 태도였다.

9월 10일 마닐라 근교의 불라칸주 말로로스가 임시 수도가 되었고, 9월 15일 필리핀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가 출범했다. 1899년 1월 21일에는 자체 헌법인 〈말로로스 헌법〉을 제정하고, 1월 23일 필리핀 제1공화국(말로로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며 독립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이 시점에서 공화국 정부는 민다나오를 제외한 필리핀 전역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리핀인들의 독립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은 1898년 12월 10일 스페인과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스페인에 2000만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에 대한 주권을 넘겨받았다. 미국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12월 21일 소위 '우애적 동화 선언'을 발표하며 필리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미국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는 필리핀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며 뒤로는 식민 지배를 계획한 미국의 배신 행위로 간주된다.

2. 4. 미국과의 전쟁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필리핀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필리핀 혁명 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추진했지만,[22][23][24]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강화 조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새로운 식민 지배를 예고했다.

결국 필리핀의 독립 열망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충돌하면서 1899년 2월 4일, 마닐라 외곽에서 미군과 필리핀군 사이에 총격 사건이 발생하며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했다.[25][136]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통령은 우발적 충돌임을 알리고 휴전을 시도했으나, 미군 사령관 엘웰 오티스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강행했다.[136] 1899년 6월 2일, 필리핀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137]

전쟁 초기,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미군에게 필리핀 정규군은 연이어 패배했고 수도 말로로스마저 함락되었다. 아기날도 정부는 북부 산악 지대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필리핀 민중들은 끈질긴 게릴라전으로 미군에 맞섰으나, 1901년 3월 23일 아기날도 대통령이 미군에 체포되면서[141]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아기날도는 미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동포들에게 항복을 권고했지만,[141] 모든 지도자와 민중이 이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미구엘 말바르 장군 등은 이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다.

미국은 군사적 탄압과 함께 친미 성향의 필리핀 유력자들을 포섭하는 정책을 병행하며 식민 통치 기반을 다져나갔다. 1902년 7월 4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필리핀의 '평정'을 선언했지만,[26][138] 산발적인 저항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필리핀 혁명은 미국의 군사력 앞에 좌절되었고, 필리핀은 다시 미국의 식민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 전쟁을 독립 혁명이 아닌 "필리핀 반란"(Philippine Insurrectioneng)으로 규정하며 그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에야 이루어졌다.

2. 4. 1.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

혁명 정부는 1898년 6월부터 9월 10일까지 선거를 실시하여 말로로스 의회로 알려진 입법부를 구성하였다.[132] 이는 혁명 정부 수립 법령에 따른 조치였다. 혁명 의회(Congreso Revolucionario)는 1898년 9월 15일 불라칸주 말로로스의 바라소아인 교회에서 소집되었다.[46] 의회 대표들은 모두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인 일루스트라도 출신이었다.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헌법 제정 의회 소집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가 직접 작성한 헌법 초안 역시 채택되지 못했다. 대신 일루스트라도 변호사 펠리페 칼데론 이 로카가 작성한 초안이 제출되어, 이를 기반으로 의회는 첫 번째 헌법인 말로로스 헌법을 제정했다. 1898년 11월 29일, 말로로스 의회는 헌법 초안을 완성했다. 그러나 에밀리오 아기날도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반대를 이유로 초안 서명을 거부했다. 마비니의 주장을 반영하여 일부 수정이 이루어진 후, 1899년 1월 21일 헌법은 마침내 의회에서 승인되고 아기날도의 서명을 받았다.

말로로스 헌법 선포 당시 필리핀 지도


이틀 뒤인 1899년 1월 23일, 필리핀 제1공화국(말로로스 공화국)이 말로로스에서 공식적으로 수립되었고,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46] 최종 헌법에는 국가가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할 때 대통령에게 법령으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133]

그러나 공화국 수립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2월 4일, 필리핀군과 미군 사이에 1899년 마닐라 전투가 발발했다. 전투는 급속히 확산되어 필리핀-미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기날도는 미군 사령관 오티스 장군에게 사절을 보내 전투 중단을 요청했으나, 오티스는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냉혹한 결말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며 이를 거부했다.[134][135] 1899년 6월 2일, 필리핀 공화국 통치 평의회는 미국에 대한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음을 선포했다.[25]

2. 4. 2. 미국-필리핀 전쟁

파세오 전투


게릴라전을 테마로 한 뉴욕저널의 풍자화, 필리핀인을 총살하는 미군의 뒤로 ‘10세 이상은 몰살’이라고 씌여 있다.


1899년 2월 4일, 필리핀군과 미군의 접경지역에서 미군 초병이 필리핀군 병사를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측 간의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25] 필리핀군이 반격하면서 제2차 마닐라 전투가 발발했다. 아기날도 대통령은 자신의 참모를 미군 사령관 엘웰 오티스에게 보내 사격은 자신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오티스는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비참한 결말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하며 이를 거부했다.[134][135][136] 결국 1899년 6월 2일, 페드로 파테르노 초대 필리핀 공화국 의회 의장은 미국에 대한 전쟁 선포를 공포했다.[25][137]

전쟁 초기,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미군에 의해 필리핀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99년 3월 31일에는 이미 수도 말로로스가 함락되었고, 공화국 정부는 중부 루손 지방의 타를라크주, 누에바에시하주 등을 전전하며 떠돌아야 했다. 11월 12일, 아기날도 대통령은 팡가시난주 비얌방에서 정규군의 해체를 선언하고 유격대에 의한 게릴라전을 선포한 뒤 루손 북부의 산악 지대로 철수했다.

정규전에서는 열세였지만, 독립을 향한 필리핀 민중의 저항은 끈질겼다. 아기날도 정권 하에서 비주류로 밀려나 있던 보니파시오 파와 혁명 종교 결사 등이 중심이 되어 치열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장기간 미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1901년 3월 23일, 이사벨라주 팔라난에서 아기날도가 미군에 의해 사로잡히면서 전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었다.[141] 아기날도는 4월 1일 미국 통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다른 독립파 부대들에게도 정전과 항복을 명령했다.[141] 이러한 아기날도의 결정은 필리핀 민중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으며, 함께 포로가 되었던 리카르테마비니 등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들의 단호한 태도는 굴복한 아기날도와 대비되어 그의 명망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기날도의 항복 이후 각지의 독립파 간부들이 투항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7월 미국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통치 방식을 전환했다. 과거 프로파간다 운동을 지지했던 신흥 유산계층 다수는 재빨리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친미파로 돌아섰고, 미국은 이들을 행정기구에 등용하여 식민 통치 체제의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모든 저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기날도의 항복을 따르지 않고 ‘혁명군 총사령관’을 자처한 미구엘 말바르 장군 등은 저항을 계속했으며, 1902년 4월 말바르가 투항한 이후에야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1902년 7월 4일 필리핀 독립 세력의 ‘평정’을 선언할 수 있었다.[26][138] 그럼에도 농민 등 하층민의 지지를 받으며 ‘타갈로그 공화국’을 선포한 마카리오 사카이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1904년 ~ 1906년)처럼 반미 게릴라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미군은 투항 권고와 철저한 탄압 정책을 병행하며 이러한 독립파 세력을 진압해 나갔다. 특히 게릴라와 농민의 연계를 끊기 위해 사용한 ‘전략촌’ 전술은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이 활용하게 되는 비인도적인 전술이었다. 결국 1910년 무렵에는 미국의 식민지 지배 체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필리핀과 동남아시아 최초의 식민지 독립 혁명은 좌절되었고,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2002년 4월 9일, 필리핀 대통령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미구엘 말바르 장군의 항복일인 1902년 4월 16일을 필리핀-미국 전쟁의 공식적인 종전일로 선포했다.[139][140]

2. 4. 3. 게릴라전과 미국의 식민 통치 확립



1899년 3월 31일 수도 말로로스가 함락된 이후, 공화국 정부루손섬 중부의 타를라크주, 누에바에시하주 등을 떠돌며 저항을 이어갔다. 11월 12일, 아기날도 대통령은 팡가시난주 비얌방에서 정규군 해체와 유격대에 의한 게릴라전을 선포하고, 루손 북부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

압도적인 전력의 미군에 맞서 필리핀 독립군은 끈질긴 저항을 보였다. 특히 아기날도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보니파시오 파 세력과 혁명 종교 결사 등이 치열한 게릴라전을 펼치며 장기간 미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1901년 3월 23일, 아기날도는 이사벨라주에서 미군에게 사로잡혔다.[141] 그는 4월 1일 미국 통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정전과 항복을 명령했다.[141] 아기날도와 함께 포로가 된 리카르테마비니 등 일부 지도자들은 항복을 단호히 거부하며 저항 의지를 보였고, 이로 인해 아기날도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아기날도의 항복 이후 각지의 독립군 간부들이 투항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7월 미국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통치 방식을 전환했다. 과거 프로파간다 운동을 지지했던 신흥 유산자층 다수는 미국의 지배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친미 세력으로 변모했다. 미국은 이들을 행정 기구에 등용하여 식민 통치 체제의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모든 저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기날도를 따르지 않고 '혁명군 총사령관'을 자처한 미구엘 말바르 장군 등은 계속해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말바르 장군이 1902년 4월 투항하자, 7월 4일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필리핀 독립 세력의 '평정'을 공식 선언했다.[26][138][122] 그럼에도 농민 등 하층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타갈로그 공화국'을 선포한 마카리오 사카이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1904년 ~ 1906년 활동)를 비롯한 반미 게릴라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미군은 투항 권고와 함께 철저한 탄압 정책을 병행하며 독립 세력을 진압해 나갔다. 특히 게릴라와 농민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전략촌' 전술을 도입했는데, 이는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이 활용하게 되는 대게릴라 전술의 원형이 되었다. 결국 1910년 무렵, 미국은 필리핀 내 저항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식민지 지배 체제를 확고히 구축했다.

이로써 필리핀과 동남아시아 최초의 식민지 독립 혁명은 좌절되었고,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3. 평가

16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 온 필리핀에서는 19세기 후반, 독립을 향한 열망이 커져 1896년 필리핀 혁명으로 이어졌다. 비록 첫 번째 혁명은 실패했지만,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계기로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나 독자적인 의회와 헌법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필리핀 민중의 독립 의지는 새롭게 등장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짓밟혔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강화 조약을 통해 필리핀의 영유권을 확보한 뒤,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 필리핀을 선교하라고 계시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으나, 이는 필리핀 인구의 대다수가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외면한 위선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침략 명분은 당시 미국 내에서도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작가 마크 트웨인과 같은 지식인들은 처음에는 전쟁을 지지했다가 참상을 알게 된 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했고, 필리핀 민중은 게릴라전 등으로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좌절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약 60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에 달하는 필리핀 민간인을 학살하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필리핀 민중의 독립 투쟁을 '혁명'이 아닌 Philippine Insurrection|필리핀 반란영어으로 폄하하며 식민 지배를 공고히 했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고, 1916년 마누엘 케손 등의 노력으로 자치권을 일부 인정하는 존스 법이 제정되고 1934년에는 10년 후 독립을 약속하는 필리핀 독립법이 통과되기도 했으나, 1942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독립은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 필리핀이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이었다.

결론적으로 필리핀 혁명은 외세의 지배에 맞서 민족 자결을 이루려 했던 중요한 시도였으나,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실패하고 독립이 수십 년간 지연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는 필리핀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평가된다.

3. 1. 일본과의 관계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스페인 등 서구 열강으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필리핀 독립 운동 진영 일부에서는 일본의 우호적인 개입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서구 열강과의 조약 개정 문제 및 미국, 스페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필리핀 혁명 전반에 걸쳐 '''공식적으로는 “중립”과 “미국에 의한 필리핀 지배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입장은 러일전쟁 이후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과 다카히라-루트 협정(1908년)에서도 재확인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별개로, 민간과 군 일부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고조된 남진론이나 아시아주의의 영향으로 필리핀 독립 혁명을 지원하여 일본의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려는 비공식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배경 속에서 호세 리살과 일본 지식인 스에히로 테쓰초의 교류, 마리아노 폰세의 일본 방문과 무기 구매 시도 및 부인마루 사건으로 인한 실패, 이후 알테미오 리카르테 장군의 일본 망명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하며 필리핀 혁명과 일본의 관계는 다면적인 양상을 보였다.

3. 1. 1. 리살과 스에히로 테쓰초

스에히로 테쓰초 / 미국 체류 중 리살과 친분을 맺었다.


1888년, 스페인 당국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던 호세 리살은 일본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 그가 묵었던 호텔 터를 알리는 비석이 히비야 공원 안에 세워져 있다.) 이후 미국을 거쳐 런던으로 향하는 길에 일본의 자유민권운동가 스에히로 테쓰초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스에히로는 영어를 하지 못해 항상 일본어를 이해하는 리살을 통해 의사소통해야 했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唖之旅行|아지료코일본어(말 못하는 이의 여행)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썼다.

1891년에는 리살을 모델로 한 필리핀인 '다카야마 다카시'(다카야마 우콘의 후손이라는 설정)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허구와 실제를 섞어 필리핀 독립 혁명을 그린 아시아주의적 정치소설 『남양의 대파란』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다카야마의 지도 아래 독립을 이룬 필리핀이 열강의 각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의 보호를 요청하여 속국이 되고, 결국 마닐라에 일장기가 휘날리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와 스에히로 자신에게 퍼져 있던 아시아주의적 시각을 반영하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정작 리살 본인은 필리핀 독립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았다.

리살이 처형된 1896년, 공교롭게도 스에히로 테쓰초 역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살이 사망한 후인 1898년 6월,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테이사부로의 주도로 리살 추도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청일전쟁 이후 얻은 타이완 문제 등으로 스페인 등으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반면 필리핀 독립 진영 일부에서는 일본의 우호적인 개입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896년 혁명부터 스페인-미국 전쟁, 1898년 혁명, 그리고 이후 미국-필리핀 전쟁에 이르기까지 필리핀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며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피하려 했다. 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이나 다카히라-루트 협정(1908년)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별개로, 민간이나 군 일부에서는 청일전쟁 승리 이후 고조된 남진론이나 아시아주의의 영향으로 필리핀 독립 혁명을 지원하여 일본의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필리핀 정세에 대한 일본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3. 1. 2. 폰세의 일본 방문과 부인마루 사건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기에, 스페인 등 서구 열강은 일본이 필리핀에 대해서도 영토적 야심을 가질 수 있다고 의심했다. 반면 필리핀 독립파 일부는 일본의 우호적인 개입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서구 열강과의 조약 개정 문제 및 미국, 스페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1896년 혁명부터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혁명을 거쳐 미국-필리핀 전쟁에 이르기까지 필리핀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미국-스페인 전쟁 및 독립 운동에 대한 중립”과 “미국에 의한 필리핀 지배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입장은 러일전쟁 이후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과 다카히라-루트 협정(1908년)에서도 재확인되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별개로, 민간과 군 일부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고조된 남진론이나 아시아주의의 영향으로, '''필리핀 독립 혁명을 지원하여 일본의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필리핀 독립 운동에 대한 일본 내 대중적 관심도 높아졌다.

1898년 6월, 무기 구매를 위해 필리핀 혁명위원회는 마리아노 폰세 등을 일본에 파견했다. 폰세는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가들에게 필리핀 독립 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한편, 이누카이 잇키, 미야자키 토텐, 그리고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 등과 교류하며 지원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헌정본당 소속 중의원 의원 나카무라 야로쿠가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과 가쓰라 다로 육군대신을 설득하여 중고 무라타총(村田銃)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무기 구입을 도운 일본 제국 육군의 일부 군인(가와카미 소로쿠 등)과 민간 활동가(낭인)들은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필리핀의 독립과 친일 세력 육성을 목표로 삼았으며, 일본인 군사 고문관을 필리핀군에 파견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1899년 7월, 구입한 무기를 싣고 일본을 떠난 운송선 부인마루(布引丸)는 상하이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7월 21일 침몰했다. 이 사건을 '''부인마루 사건'''이라고 부른다. 설상가상으로 8월 19일에는 미국군에 체포된 필리핀군 장교의 자백으로, 일본인 6명이 무기 공급을 위해 전선을 뚫고 마닐라에 잠입한 사실이 드러나 미국 당국에 체포되었다.[143] 부인마루 침몰과 일본인의 필리핀 혁명군 가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일본 영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했다. 이로 인해 미국과 일본 양국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자금마저 고갈되어 추가적인 무기 구입과 수송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아기날도가 이끄는 필리핀군이 패퇴하면서 잠입했던 일본인들도 필리핀을 떠나 귀국했고, 결국 무기 지원 계획은 좌절되었다. 1899년 9월 27일, 폰세 일행은 실의에 빠진 채 홍콩으로 떠났다.

이후 일본에서는 필리핀 독립 운동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 1901년 폰세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쓴 독립 운동사 『남양의 풍운(南洋の風雲)』이 번역 출판되었다. 1902년에는 폰세와 교류했던 야마다 비묘가 역사소설 『아기날도(あぎなるど)』를, 폰세의 무기 구입을 도왔던 오시카와 호기(押川方義)의 아들인 오시카와 슌로가 모험 소설 『무협의 일본(武侠の日本)』을 출판하는 등 관련 출판 붐이 일기도 했다.

3. 1. 3. 리카르테의 일본 망명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타이완을 얻은 후 필리핀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필리핀 독립파는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일본 정부는 조약 개정 문제와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공식적으로는 중립과 미국의 필리핀 지배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러일전쟁 이후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및 다카히라-루트 협정(1908년)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민간과 군 일부에서는 남진론과 아시아주의의 영향으로 필리핀 독립 혁명을 지원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남쪽으로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했다.

이러한 복잡한 배경 속에서 필리핀군 고위 장교이자 카티푸난 시절부터 활약한 영웅이었던 알테미오 리카르테 장군은 1900년 미군에 체포된 후에도 미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다. 이는 일찍 항복한 아기날도와 대비되어 그에게 더 큰 국민적 지지를 안겨주었다. 리카르테는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속을 목표로 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국외 추방을 겪은 끝에 1915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처음 아이치현 세토시, 이후 당시 도쿄부 세타가야를 거쳐 최종적으로 요코하마시 야마시타초에 정착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일본 정부는 리카르테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지만, 비공식적으로 그의 망명을 허용했다. 그는 두야마 만과 같은 국가주의자들과 일부 일본군 수뇌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요코하마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생계는 스페인어 교사로 근근이 이어가야 했으며,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군이 필리핀에 진주하면서 귀국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사실상 '감금'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본국에서는 리카르테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귀국할 것이라는 소문이 1930년대까지 끊이지 않았으며, 1936년에는 이 소문을 믿은 민중들이 무장 봉기(사쿠달당 봉기)를 일으키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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